0. 시작하기에 앞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봐 내 테크트리부터 말씀드려야 겠다.


시작은 웹애니메이션이었다.


웹애니메이션 시장이 죽어가면서 이러닝으로 자연스럽게 올라탔고, 이러닝을 하다보니 의레 그러듯 액션스크립트도 만지게 되었다


그 후 웹에이전시에서 세월을 보내고, 거기서 쌓여진 액션 스킬로 SI 시장에서 플래시 어플리케이션을 만들어댔다. 이 때 만든 것은 뭐, 차트라던가... 차트라던가... 차트였었고...


그다음 테크는 인터랙티브 미디어였고, 현재는 스케일폼이다...



플래시의 꽤 여러 시장을 거쳤지만, 당연히 모든 분야를 거치진 못하였고, 보면 알겠지만 정통 개발자와는 거리도 멀다. (멀어도 너무 멀다.)



그냥 짬밥과 인맥으로서 나머지 다른 분야들도 알고는 있지만, 같은 이유로 그 분야의 역사와 현상황을 완벽히 대변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이 포스팅은 그냥 B급 읽을거리로 생각해주길 바란다...






1. IMF, 그리고 마시마로




1997년에 일어난 IMF는 98년도에 시작된 김대중 정부에게 암울한 경제적 유산을 물려주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 타개책 중의 하나로 IT 육성정책을 선택하였는데, 이는 90년대 중반부터 일어난 멀티미디어 PC 열풍과 맞물려 파급 효과가 대단하였다.



김대중 (2001년)


(빚과 함께 시작된 김대중 정부)





수많은 IT회사가 생겨나게 되었고, 시내에 나가면 정말로 모든 건물마다 웹디자인/웹마스터 학원이 난립하던 시기였다.

(선생이 부족해 학원 졸업생이 다시 선생으로 둔갑하는 웃지 못할 촌극도 많았다)




내가 바로 IMF 세대인 95학번이였고, 더욱더 암울하게도 보잘것 없는 지방 전문대의 학생이었다.


원래 만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여러 상황상 힘들어 졸업 후 다른 일을 찾아야만 했던 그 해가 바로 2000년도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웹마스터 10개월 과정을 택한건, 스스로의 의지였다기 보다는 자연스런 과정이였으리라...



그 과정 중 딱 한달, 플래시 과정이 있었는데...



그 즈음이었다... 누가 먼저였는지도 모르게 마시마로와 졸라맨이 인터넷을 떠들석하게 했었던건...


만화가를 꿈꿨던 나는 자연스레 눈길이 향하게 되었다.





2. 마시마로의 문화적 충격



졸라맨보다는 마시마로가 산업계에 끼치는 영향력이 더 대단했다고 할 수 있다.



졸라맨은 소위 B급 물이라고 불리는 적절한 개그의 결과물이었다면...

둘리 정도만이 토종 캐릭터로서의 인지도를 가지고 있던 시절, 마시마로는 뉴스에까지 나오는 기염을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모바일 게임으로 졸라맨이 남아있는걸 보면 졸라맨도 참 대단하다)




(아... 정말 그때는 대단했어요)





웹애니메이션 시장은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


점점 퀄리티와 양을 동시에 늘려가게 되었는데, 이는 셀애니메이션의 시장 상황과도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셀애니메이션 시장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열악했고, 지금도 열악하다.

그 열악한 작업 환경을 겪고 나와 감독이 되는 것이 목표인데... 감독이 되어서도 결국 일본 애니메이션의 하청작업을 해야하는 것이 바로 그 시장이다.


그런데 1인 제작이 가능했던 웹애니메이션 시장은 마치 오아시스 같았을 것이다.


마시마로의 성공까지는 원치 않아도 됐다.

적어도 그런 셀애니의 열악한 환경은 벗어나는 것이었으니, 많은 원화가와 동화가가 웹애니메이션 회사로 들어오게 되고 그것은 자연스레 퀄리티의 업그레이드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우비소년과 뿌카, 오인용과 같은 완성도가 높은 결과물도 있었고, 여전히 인터넷의 특성에 맞는 B급 컨텐츠들의 양으로서의 승부도 대단했다.




(류승범이 목소리를 맡은 웹애니메이션까지 있을 정도... 그 작품 이름을 처음 맞히는 분에게 선물로 심심한 축하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런 웹 애니메이션 시장은 e-letter 라고 불리던 플래시 메일 시장으로 이어지기까지 하여 계속 세를 이어나가게 되었다.







3. 하지만...



 



(질은 매우 높아졌지요...)






말했던 대로 질은 높아졌지만, 양 또한 너무나 많아지게 되었다.


게다가 웹애니메이션은 애초에 그 자체로 수익이 없는 녀석이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였을 것이다)




우비소년처럼 방송으로 진출하거나, 뿌카처럼 캐릭터 사업이 성공한 케이스도 있지만... 소위 잘나가는 몇몇 업체들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불안한 세계였다.


그로 인한 결과는 가격파괴로 이어지는 것이 시장의 생리 아니던가...

개인들은 잘 나가면 프리랜서, 못나가면 알바생의 수준이였다고나 할까...




열악한 수익 구조도 문제지만, 웹애니메이션은 독점적인 컨텐츠 플랫폼으로서의 역할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한 데에는 발전하는 인터넷 속도의 영향도 있었다.


벡터 애니메이션은 적은 용량으로 인해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느렸던 인터넷 속도 내에서 최고의 컨텐츠를 보여줄 수 있는 플랫폼이였지만, 인터넷 속도가 높아짐에 따라 그런 독점적 지위는 잃어가게 마련이었다.


인터넷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불법이지만) 게임과 동영상 컨텐츠 다운로드가 인터넷 회사의 중요한 킬러컨텐츠가 되어가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 속에서 웹 애니메이션은 1회용 소모성 컨텐츠로 전락될 뿐이였다.





4. 마리 이야기, 그리고 이러닝




2001년도 개봉한 마리 이야기는 당시의 국산 애니메이션 시장에서는 꽤나 신선한 작품이였다.


나름 성공도 했지만 플래시 애니메이션을 하던 사람들에게 더 관심이 갔던 것은 작품의 일부가 플래시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아마도 마리 이야기의 독특한 화풍이 그걸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플래시가 쓰일만도 했던 독특한 화풍... 플래시는 마리 이야기에서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난 이때가 가장 피크였다고 생각한다.



마리 이야기가 웹애니메이션 시장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하다기 보다는 그냥 웹애니메이션 시장이 저물어가던 시기가 그 시기였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웹애니메이션을 만나볼 수 있다.



여전히 수요도 있고, 작품성도 있는 녀석들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웹 애니메이션은 인터넷 시장에서 다른 의미가 있다.

멀티미디어 1인 제작... 바로UCC의 시대를 연것이다. 이는 향후 다른 사업으로서의 가교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역사적 소임이 무슨 상관이겠나... 웹애니메이션을 만지던 사람들은 갈 곳을 잃어 방황하히 시작했다.


모든 사업이 그렇듯 웹 애니메이션 시장은 찬란했던 과거를 지나 그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드디어 웹애니메이션으로 수익을 얻을 수 있는 플랫폼을 찾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러닝 시장이였다.








Posted by 미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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